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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주석과 정낭(Jeongjuseok and jeongnang)

    집 입구의 양쪽에 구멍을 뚫은 돌(정주석)이나 나무를 세우고 나무(정낭)를 가로로 걸쳐 놓은 것이다. 나무의 개수에 따라 집에 사람이 있고 없음을 알리는 대문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소와 말의 출입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정낭 3개가 모두 걸쳐있으면 집 주인이 멀리 가서 며칠이 지나서야 돌아온다는 것을 뜻한다.
      <멀티미디어 제주민속관광대사전에 소개된 정낭>

    제주 전통민가에는 대문이 없다. 그 대신 '정낭'이라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여기서 정낭 하나만 걸쳐있으면 주인이 잠깐 외출한 것이고 두개가 걸쳐있으면 좀 긴 시간을 외출했다는 신호며, 세 개가 다 걸쳐있으면 종일 출타중이라는 신호로 삼았다.
      <발췌 : 제주의 민속 4권 P446, 1996년>

    도둑이 없어 대문이 필요 없던 제주에는 우마의 출입을 막거나 사람이 있고 없음을 알려주는 구실을 하는 정낭이 있다. 정낭은 정주목이나 정주석을 양쪽에 세워 통나무로 만들어진 정낭이 하나 올려진 것은 주인이 가까운 곳으로 외출하였고, 곧 돌아올 것임을 말한다. 두 개가 올려진 것은 집에는 아이들만 있거나 주인이 잠시 밭일을 하러 나갔음을 말한다. 세 개가 올려진 것은 집에 사람이 없고, 먼 곳으로 외출을 나가 며칠 있어야 돌아옴을 말한다.
     < 발췌 : 제주의 민속 4권 P446, 1996년>

      『이 고을 풍토는 별다른 구역으로 모든 것 하나하나가 놀랍고 해괴하게 느껴진다…』김정(金淨)의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은 이렇게 시작된다. 비단 김정의 풍토록뿐 아니고 제주를 다녀간 대부분의 학자들의 기행문에도 제주가 내륙지방과는 다른 풍토, 풍속을 지니고 있다는 기록들을 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는 『풍토가 특수하고 민속이 다르며 군졸은 사납고 백성들은 어리석다』고 기록하고 있다. 탐라지(耽羅志)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지(地志)에서도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옛 기록들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 제주의 풍토, 풍속이 우리나라 내륙지방과는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부터 50년 전만해도 섬밖의 사람이 제주를 보면 여느 지방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색다른 풍토와 만나고 신비한 눈으로 비쳤을게 분명하다.

    길은 흙 길이라기보다는 돌투성이 길이고 번듯하기보다는 울퉁불퉁했으며 곧기보다는 구부렁 길이었다. 거리에서나 들에서나 어디를 가도 구멍이 뻐끔뻐끔 드러나 보이는 엉성한 돌담이 따라 다닌다. 돌담뿐 아니고 방사탑, 돌하르방, 석상, 물팡, 돌방아, 돌무지, 잣성 등 어디를 가도 수많은 석로물과 만나게 된다. 집은 나지막하고 처마밑까지 흙돌벽을 두르고 지붕은 반드시 지붕줄(새로 엮은 줄)로 동여매놓고 있다. 대문은 길에 나앉지 않고 휘돌아 들어가는 올래(진입하는 길목)처리를 하여 정낭(문을 대신하는 장대나무)으로 대신한다. 마을은 깊숙한 곳에 자리하여 나무숲에 덮이고 돌담으로 가려 바로 앞에 이르러도 볼 수 없다. 한라산 정상에 올라도 마을 하나 볼 수 없는 곳이 제주다. 이 • 삼십리 밖에서도 마을을 볼 수 있는 내륙지방과는 너무나 다르다고 할 것이다.

    거리나 밭이나 냇가가 아니라도 어디서나 여자를 만날 수 있는 곳이 제주다. 산이나 바다 어디를 가도 유난스럽게 여자들과 만날 수 있으며 그들은 모두가 일하고 활동하는 여자들이다. 또 물건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것과는 달리 등에 걸머지거나 옆구리에 껴안고 다닌다. 이 같은 현상은 내륙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제주를 다녀간 사람들이 신비한 눈으로 보고 색다른 감동과 깊은 인상을 지니고 떠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눈에는 제주가 석다(石多)의 섬으로 비치기도 하고 풍다(風多)의 섬으로 비치기도 하고 또 여다(女多)의 섬으로 비치기도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는 이 삼다도는 제주인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순전히 그들의 눈에 비친 제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의 눈에는 이 제주가 오로지 이 삼다로만 비쳤을까? 그것은 아니었다. 제주를 보는 눈은 실로 많았다고 할 수 있다. 다음에서 제주를 본 여러 시각들은 어떤 것이었나를 한번 훑어보고 삼다도로 정착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탐라에 대한 내용이 고대 중국과 일본의 문헌에 적지 않게 나오는 점을 볼 때, 고대로부터 주변의 여러 민족이 관심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고대 탐라이지만 앞서 열거한 고대 문헌기록들은 그 대부분이 각 나라 입장에서 대외적인 외교관계에 치중하여 있고, 그 대내적인 실상에 대한 기술은 매우 한정되어 있다. 그러한 기록의 빈곤성 때문에 고대 탐라가 어떠한 역사와 문화의 변천과정을 경험하였는가에 대해서 분명한 윤곽을 잡기가 어렵다. 구체적으로 언제 탐라가 일정 수준의 정치• 사회적 구조를 갖는 체제를 갖추었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한반도 중앙집권국가의 체제에 편입되었는가가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고대 탐라가 성립하기까지 제주 주민의 문화가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가에 대해서도, 그동안 이 지방의 고고학적 연구조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여 밝혀진 것이 드물다. 이러한 상황은 탐라가 고려 정부에 편입된 이후 고려 -조선왕조의 주초에 기록됨으로써 그 실상이 알려지는 중세 이후의 제주 역사와 큰 대조를 보인다.

    다행히 1980년 중반 이후에 제주대학교박물관이 이 지방의 고고학적 조사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면서 기록이 전하지 않는 선사시대의 문화적 변천상이 서서히 드러나게 되었다. 아울러 역사기록이 전하는 시기 이후에도 기록에 별로 전하지 않는 대내적인 탐라의 실상과 생활문화를 이해하는 데, 새롭게 찾아진 고고학적 자료가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한편 탐라에 대한 고대문헌 기록에 대한 연구가 비록 일본서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것이고, 그리고 고대 일본과의 관계에 한정한 것이지만 일본인의 연구논문이 최근에 발표된 바 있다. 그 중에는 탐라가 고려에 편입되는 과정에 대한 연구도 있어, 비록 외국인에 의한 것이기 하나 문헌사학에서 고대 탐라의 대내적 변천과정에 대한 윤곽이 서서히 잡히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최근의 고고학과 문헌사학의 연구 성과에 힘입어, 그 동안 막연하게 다루어져 왔던 탐라의 형성과 변천과정에 대해 분명한 접근의 틀을 세우려는 것이다. 또한, 앞서 탐라에 관한 대부분의 고대문헌기록이 그렇듯이, 주변 국가의 입장에서 대외관계에 치중했던 틀에서 벗어나, 제주를 주체로 하는 입장에서 제주 문화사의 지속적인 내적 전개 과정을 밝히는 데 목적을 두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비록 유적유물 자료는 물론, 문헌 자료가 충분하지 않지만, 고고학과 문헌사학의 조사연구성과를 조합하여 제주라는 단위 지역 속에서 전개되는 문화의 변천과정을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정낭 제주의 전통가옥